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잉그리드 버그만 (문단 편집) == 여담 == * [[스웨덴어]],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구사했고, 해당 언어로 모두 연기를 하였다. 영국의 대배우 [[존 길구드]]는 "아, 불쌍한 잉그리드. 5개 국어를 하지만 그 중 어떤 언어로도 연기는 못한다네"라는 영국인 특유의 위트있는 독설을 날리기도 했다. 본인도 할리우드 데뷔 4년차였던 히치콕의 <[[오명(영화)|오명]]> 때도 영어 연기에 자신이 없었다고 말했을 정도. 실제로 스웨덴어를 제외하곤 해당 언어들을 모국어로 쓰는 사람의 입장에선 외국인이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어려우며, 또 하나의 모국어인 독일어 역시 스웨덴어 억양으로 말했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특징이듯이,해당언어의 본토 사람들에겐 그 언어가 어색하게 들린다는 것이다. 이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영어 영화에선 북유럽인, 프랑스어 영화에선 동유럽인으로 나오는 식으로 해당 언어의 원어민 구사자가 아니라는 설정이 자주 들어갔다. 그럼에도 버그먼의 출중한 연기력은 그런 약점을 상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 평생 [[잔 다르크]]를 연극에서 두 번, 영화에서 두 번 총 네 번 연기했다. 버그먼은 어릴 때부터 평범한 소녀가 영웅이 되는 잔 다르크의 서사를 사랑했다고 하며 잔 다르크를 연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첫 잔 다르크 역인 <[[잔 다르크/기타 창작물#s-5|잔 다르크]]>는 당시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가 잔 다르크 역할을 맡았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으며[* 영화의 작품성, 연기력 부분에서는 <[[잔 다르크의 수난]]>(1928)의 마리아 팔코네티가 최고의 잔 다르크로 여겨진다.] 잔 다르크와 관련된 지역인 동레미, 오를레앙, 랭스와 루앙을 방문했으며 동레미의 명예시민이 되기도 했다. 버그먼이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잔 다르크의 환생처럼 여겨서 당황했을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이었다고 한다. 또한 잔 다르크의 고향 동레미를 굉장히 사랑했다고 한다. 다만 이 영화를 찍을 때 버그먼이 이미 30대를 넘어서 10대 소녀인 잔 다르크를 연기한 게 어색하다는 평도 있다. * 자녀들에 따르면, 버그먼은 카메라는 편안하게 대했지만 무대공포증이 매우 심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연극에 출연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것 자체가 "고문"으로 느껴질 정도였다고. * 출연작 <가을 소나타>(1978)를 연출한 [[잉마르 베리만]]과 성이 같지만 혈연 관계는 아니다. * 데뷔 전 [[코]]가 너무 크다고 [[성형]] 권유를 받은 적이 있으나, 자신은 코가 맘에 든다며 고치지 않았다고 한다. 또 키가 너무 커서 성공하지 못할거라는 평도 받았다고 한다.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무렵에 미군 위문공연으로 유럽에 방문했다가 [[로버트 카파]]와 만나 연인이 되었다. 당시 버그먼은 첫 번째 남편과 혼인관계였다. 로셀리니 이전 연인이 카파였던 것. 버그먼은 카파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카파는 전쟁터에서 자신이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버그먼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스페인 내전]]에서 죽은 자신의 첫 애인 생각 때문에 거절했다고 한다. 예감대로 카파는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지뢰를 밟아 사망했다. * 할리우드에서 추방되었을 때도 복귀했을 때도 변함없이 [[우정]]을 지켜준 것은 배우 [[케리 그랜트]] 단 한 사람뿐이었다. 전술했듯이 이 당시 할리우드는 대다수 배우가 불륜 경험이 있던 시절인데, 많은 또래 배우들이 자신들은 대중에게 들통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젠체하며 버그먼과 내외했던 것이다. 버그먼은 평생 함께 연기한 모든 남자 배우들 중에 그랜트를 가장 존경했다. * 첫 남편 피터 린드스트롬과의 사이에서 딸 피아 린드스트롬을 두었고,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사이에서 아들 로베르토 로셀리니[* 불리는 이름은 아버지와 같지만 가운데 이름이 다르다.], 쌍둥이 딸 잉그리드 이조타 로셀리니와 [[이사벨라 로셀리니|이자벨라 로셀리니]]를 두었다. 엄마를 닮은 이자벨라 로셀리니는 여배우로 활동했고 랑콤 전속 모델이기도 했다. 버그먼의 손녀이자 이자벨라 로셀리니의 딸 얼레트러 로설리니 위더먼 역시 랑콤 모델로 활동한 바 있다. * 남자 관계는 복잡했지만 자녀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줬으며 아무리 바빠도 같이 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최선을 다하는 가정적인 어머니였다고 한다. 다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질 못하는 성격이어서 아이들과도 같이 살지는 못하고 항상 떠돌아 다녔다. 이런 버그먼의 행동을 자녀들은 이해하면서도 그리워 했다고 한다. 자녀들은 이부남매끼리도 사이가 좋아서 그녀의 생전에도 사후에도 연락을 하고 만나고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newyorksocialdiary.com/937811571_dc7c8073e5_o.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farm2.static.flickr.com/938655346_3137ae4aa2.jpg|width=100%]]}}} || * 유작 (1982)가 TV 영화였기 때문에 <[[레이더스(영화)|레이더스]]>(1981)의 포스터를 그린 바 있는 유명 삽화가 리처드 앰슬[* Richard Amsel. 1947 - 1985.]이 TV 프로그램을 다루는 잡지 TV GUIDE의 표지를 위해 그해 버그먼의 초상을 그린 적이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_Woman_Called_Golda_1982_amsel.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_Woman_Called_Golda_1982_tvguide.jpg|width=100%]]}}} || * 버그먼을 모델로 한 [[앤디 워홀]]의 1983년 [[팝아트]] 작품 "Ingrid Bergman With Hat(모자를 쓴 잉그리드 버그먼)"이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230101_114255.jpg|width=100%]]}}}|| * 2015년 잉그리드 버그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칸 영화제]] 포스터에 등장하였다. 또한 일기, 편지, 가족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만든 다큐멘터리 <그녀, 잉그리드 버그먼(Jag är Ingrid)>이 상영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dl9fvu4r30qs1.cloudfront.net/cannes-2015-poster.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thefilmstage.com/ingrid_bergman_in_her_own_words_poster_2-620x930.jpg|width=100%]]}}} || || {{{#ffffff '''2015년 칸 영화제 공식 포스터'''}}} || {{{#ffffff '''<그녀, 잉그리드 버그먼> 포스터'''}}}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